케르미Kermi(2,790m)를 출발하면서 어마어마한 염소와 양 떼를 만났다. 여름 3개월 동안 풀밭을 찾아 이동한다는 목동. 그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염소 몇 마리가 풀밭으로 향했다. 부지런히 풀을 뜯던 녀석들은 목동이 소리치고 나서야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돌아왔다. 덩치 큰 녀석들은 양쪽에 소금 주머니를 지고 다녔다. 금방 태어난 새끼 염소 두 마리를 지고 가는 녀석도 있었다.무성한 풀밭을 지나자 허름한 천막이 나왔다. 라마싱 카르카Lamasing Kharka (3,355m)다. 카르카는 목초지라는 뜻이다. 현지인들은 이곳에
아침에 창문을 열다 눈을 의심했다. 어제는 없던 산이 불쑥 나타났다. 며칠 동안 구름에 가려 볼 수 없었던 다울라기리Dhaulagiri (8,167m)였다. 스완타Swanta(2,270m)를 벗어나 맞은편 마을에 섰을 때도 입이 떡 벌어졌다. 마을 뒤로 선명한 자태의 다울라기리가 눈부시게 빛났다. 사전 정보 없이 오긴 했지만, 이 정도로 멋진 곳인 줄 몰랐다.이번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정해진 일정도 코스도 없었다. 지도를 보다가 새로운 곳이 눈에 들어오면, 그곳이 궁금해 코스를 변경했다. 같이한 포터 데브도 적극적이라 우리는 저녁마다
마르디 히말Mardi Himal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 트레킹을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촘롱Chhomrong(2,170m)에서 추일레Chuilre(2,245m)까지는 반나절이면 되지만, 이쯤에서 걸음을 멈췄다. 여러 날 전투하듯 걸었으니 어느 한 날은 느긋하게 보내고 싶었다. 점심으로 감자튀김과 값비싼 맥주를 주문했다. 야외 테이블에서 물고기 꼬리를 닮은 마차푸차레Machapuchre(6,997m)를 바라보며, 천천히 맥주를 음미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한껏 여유를 부렸다. 히말라야에서 실패하지 않
7월 말, 날이 뜨거워지자 발토로Baltoro빙하의 온갖 것들이 쓸려 내려왔다. 수량이 불어난 브랄두Braldu강은 난폭하고도 급하게 흘렀다. 강 위에는 허술해 보이는 다리 하나가 전부였다. 다리 아래에선 강물이 꿈틀대며 거친 침방울을 내뿜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리가 맥없이 흔들렸다. 우리는 술에 취한 듯 비틀거렸다. 파키스탄 트레킹에서 만난 다리는 매번 이렇게 인상적이었다.하루를 꼬박 걸어서야 첫 야영지인 어퍼줄라Upper Jhula(3,218m)에 도착했다. 어쩐 일인지 가이드가 병든 닭처럼 힘이 없어 보였다. 가뜩이나 마
1년 사이 얼굴이 더 까매진 그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악수를 청했다. 2018년 파키스탄 트레킹에 나섰을 당시 포터대장이었던 사비르. 스판틱 베이스캠프Spantik BC(4,310m) 트레킹은 그가 강력히 추천한 곳인데, 정작 그의 고향인 줄은 몰랐다. 그도 내가 다시 파키스탄에 나타날 줄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여행자들이란 부도수표를 남발하는 족속들 아닌가. 언젠가 다시 오겠다는 약속은 기약이 없다는 걸 그들도 모르진 않을 테고. 파키스탄 히말라야 트레킹은 야영이 필요한 곳이 대부분이다. 네팔처럼 로지Lodge(숙소)가 있는 곳
시작은 사진 한 장이었다. 물기 없는 산과 그 아래 청록빛 호수. 심샬 파미르Shimshal Pamir…. 마치 알고 있던 곳처럼 내내 입에서 맴돌았다. 꼭 가야만 할 것 같은. 희한하게도 히말라야의 여러 모습 중 유독 건조한 히말라야에 끌렸다. 의도한 것도 아닌데 최근 몇 년간 히말라야가 훅 치고 들어왔다. 처음엔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더니 이제는 마음 전부를 차지하려 들었다. 그런 내게 파키스탄 북부는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더 거칠고 야생적이고 아름답기까지 한 곳. 발길 닿는 곳마다 환상적인 풍경을 마주하는 곳. 파키스탄 히말라
2016~2017년 2년 동안 네팔 히말라야 횡단을 하면서 약 4,500만 원을 썼다. 혼자인 데다 초보나 다름없어서 큰돈이 들었다. 시행착오도 한몫했다. 누군가의 금전적인 후원이나 장비 지원 같은 건 전혀 없었다.처음부터 히말라야 횡단을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저 17년간 다닌 회사를 그만두며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었다. 히말라야에서 3개월 동안 걸으면 어떨지 궁금했다. 그런데 그 3개월이 시작이 될 줄 몰랐다.회사 다닐 때 한 연구원과 나눈 이야기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는 퇴직하면 세계여행 경비로 1억 원을 쓰겠다고 했다.
야크Yak는 히말라야에서 가장 상징적인 동물이다. 해발 4,000~6,000m에 이르는 고산지대에 살며, 무게가 500~1,000㎏까지 나간다. 날카로운 뿔은 위엄이 넘치고 큼지막한 눈망울은 한없이 순하다. 큰 덩치에 풍성한 털로 덮여 있어 폭설이 내릴 때 아무것도 먹지 않고 일주일을 버틸 수 있다고 한다. 히말라야 오지에서 길을 잃었을 때 야크를 만나면 반갑다. 가까이에 사람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보통 ‘야크’라고 부르지만 엄밀히 말하면 수컷이 야크고 암컷은 나크Nak이다. ‘야크 치즈’라는 말도 실은 틀린 말이다. 암컷 나
제주를 다시 찾은 건 5년 만이었다. 그 사이 나는 해마다 반년씩 히말라야 기슭을 걷는, 히말라야를 걷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2년 연속 하늘길이 막히면서 어디로도 떠나지 못했다. 걷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던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이 제주의 숲이었다. 전남 고흥 녹동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떠났다. 비대면 여행을 위해 이번에도 홀로 차박을 하며 다녔다. 나무가 빼곡한 숲을 걷고 싶었다. 한라생태숲의 숫모르숲길이 그랬다. 설렁설렁 걷다가 편백나무숲에서 잠시 멈췄다. 나무의 청량함이 그대로 전해졌다. 참으로 아름다운 숲이다.
어느 스님의 라는 책을 보고 나서였다. 불자는 아니지만 전국의 108개 산사를 찾아다니며 108배를 해보고 싶었다. 여행을 시작한 건 2008년. 한 친구와 절반을 같이 하고, 이후에는 드문드문 혼자서 이어갔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여행이 다시 생각난 건 최근이었다. 왠지 마무리할 때가 된 것 같았다. 남은 곳은 충청과 전북지역의 33산사. 이번에도 홀로 차박을 하며 다녔다. 월악산 자락의 신륵사는 아무도 없는 듯 고요했다. 청량한 산새 소리만 산중에 퍼졌다. 작은 절엔 대웅전 하나와 석탑이 전부였다. 신
2011년 34세, 혼자 백두대간을 했다. 직장생활을 하며 매주 야영배낭을 메고 백두대간으로 향했다. 5월에 시작한 길은 10월에서야 끝났고, 17개 구간에 걸쳐 5개월 반이 걸렸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21년 44세, 다시 백두대간을 찾았다. 이번엔 자동차였다. 백두대간 자동차 여행은 간단했다. 차박을 하면서 백두대간의 주요 고개를 넘는 것. 지난달에 이어 대간 차박 여행 이야기를 이어서 풀어낸다.영월에서 태백산 가는 찻길은 그야말로 구불구불했다. 속도를 낼 수 없었지만 봄을 만끽하기에 충분했다. 경치가 좋으면 차를
2011년 34세, 혼자 백두대간을 했다. 직장생활을 하며 매주 야영배낭을 메고 백두대간으로 향했다. 5월에 시작한 길은 10월에서야 끝났고, 17구간에 걸쳐 5개월 반이 걸렸다.10년이 지난 2021년 44세, 다시 백두대간을 찾았다. 이번엔 자동차였다. 백두대간 자동차 여행은 간단했다. 차박을 하면서 백두대간의 주요 고개를 넘는 것이다. 차로 넘을 수 있는 백두대간 고개를 찾아보니 모두 46곳. 백두대간 사이에 낀 고개까지 하면 60곳쯤 된다. 길을 확장해서 멀리 돌면 80곳까지 나온다. 내가 넘은 고개는 총 52개다. 폐쇄된
속 깊고 착한 가이드 삼덴네팔 돌포Dolpo는 내가 히말라야를 좋아하게 된 시작이었다. 히말라야 동쪽부터 서쪽까지 걷기로 마음먹었던 것도 돌포에서였다. 이젠 네팔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 되었다.2016년 돌포. 가이드 삼덴은 “좋은 아침입니다”하고 차를 가져왔다. 요리사가 없었지만 그는 매끼 밥과 국에 5가지 반찬을 내왔다(동행자가 체력저하로 하산하면서 요리사도 같이 내려갔다). 특별한 날엔 잡채나 닭볶음탕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한국에서 7년 동안 일했던 그는 한식요리 솜씨가 여느 요리사 못지않았다. 심지어 김치도 담글 줄 알았다
2017년 5개월간 히말라야 트레킹을 할 때, 네팔어 책을 가지고 다녔다. 현지어를 배워보고 싶었다. 네팔어는 우리말과 어순이 비슷해서 단어만 대충 조합해도 다들 알아들었다. 하루는 걷다가 가이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멀라이 창 먼 뻐르처.”(나는 창을 좋아해요)가이드는 크게 웃었고 그 뒤로 창Chang이 있는 곳마다 꼬박꼬박 챙겨 주었다. 티베트 전통술인 창은 우리나라 막걸리와 비슷하지만 달지 않고 도수가 더 낮다. 집집마다 맛이 다르며 주로 기장, 쌀, 밀, 옥수수, 보리 등을 발효시켜서 만든다. 일부 지역은 버터나 달걀을 넣어
나는 눈부신 히말라야보다 척박하고 황량한 히말라야를 먼저 만났다. 세상 밖 풍경처럼 보였던 사진 한 장에 반해서, 2014년 10월 처음으로 네팔을 찾았다. 무스탕Mustang은 신비로웠고 황량한 아름다움은 마음을 끌었다. 그러나 음식은 풍경에 반비례했다. 만만한 샌드위치나 스파게티는 누구의 맛도 아니라서, 종종 삶은 감자로 식사를 대신했다. 그게 아니면 맨밥만 시켜서 한국에서 가져간 반찬과 같이 먹었다.그나마 입맛에 맞았던 음식은 티베트식 수제비인 뗀뚝Thentuk과 칼국수인 뚝바Thukpa였다.티베트 음식은 대체로 입맛에 잘 맞
1998년, 산에 다니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당장 필요한 게 등산화였다. 당시 산악회에는 초보자들을 위한 ‘장비모임’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진 종로5가 ‘산으로 가는 길’ 장비점에서 주로 모였다. 친구와 나는 쭈뼛거리며 모임에 참석했고, 그들의 추천을 받아 몇 가지 장비를 샀다. 그중에서도 중등산화는 꽤 낯선 물건이었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등산화는 무겁기까지 했고, 이런 것을 신고 걷는다고 생각하니 뭔가 대단한 걸 하는 것 같았다. 산행경력이라고는 몇 번이 전부였던 어느 날, 두 사람이 내게 지리산 무박종주를 제안했다. 나는 그게
처음 산에 간 건 1998년 8월, 스물한 살 때였다. 친구를 따라서 PC통신 산악회인 유니텔 산사랑에 가입했고, 첫 산행으로 명지산에 갔다. 당시 산악회에서는 버스에서도, 조별산행에서도, 전체모임에서도 띠별로 자기소개를 시켰다. 반복되는 소개에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두 살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서 속된 말로 뻥을 쳤다. 결혼해서 애가 있고 남편은 군대에 가 있다고. 의외로 사람들은 나의 장난을 신선하게 받아들였고, 그 일은 나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결과가 됐다. 첫 산행이 마지막 산행이 될 거라 예상했지만, 다음 산행에도 참여했고
17년간 한 회사에 다니면서 월급의 70~80%를 저축했다. 떠나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일했으면 그만큼은 놀아야 한다는, 나름의 철학이 있었다. 디데이는 마흔이었다. 나는 활동할 수 있는 나이를 80으로 보았고, 그 절반인 마흔을 인생의 후반이라 생각했다. 전반부에서는 남들처럼 학교 다니고 회사 다니면서 비슷하게 살았다면, 후반부는 다르게 살고 싶었다. 고백하자면 멋대로 살고 싶었다.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남들 눈치 보지 않고, 머물기보다 떠나는 삶이었으면 했다. 마흔을 앞두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인터넷에 떠돌던 사진 한 장을 보